언젠가가 2026년이 된 이유
창업은 언젠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대학교 시절 수업에서 그런 세계가 있다는 걸 알았고, 대학원에서 실제 만들어 보는 프로그램에도 참가했었다. 여러 창업가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 이야기들은 나를 두근거리게 했다. 그러나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회사를 고르는 과정에서도 창업을 기준에 두기 시작했다. 이 회사에서의 커리어가 나의 창업에 어떤 도움이 될까를 고민했고, 마지막으로 신세졌던 스타트업에 들어갈 때 면접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창업에 관심이 있고, 스타트업이 실제로 어떤 곳인지 겪어 보면서 내가 그런 환경에 맞는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다고. 그러니까 2026년에 갑자기 생긴 생각은 아니다. 다만 언제 할지는 정해 둔 적이 없었고, 이렇게 빨리 하게 될 줄도 몰랐다.
2026년 초의 나는 백엔드와 인프라를 맡고 있었다. 필요한 기능을 위한 구조를 설계하고 실제 개발하고 운영하는 일은 익숙했다. 그 일은 이미 누군가 쌓아 올린 인프라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해 늦봄 맡은 일은 조금 달랐다. 기존 환경을 바탕으로 GCP 프로젝트부터 클러스터, 네트워크까지 0부터 다시 세워야 했다.
큰 그림은 알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직접 해 본 적은 없었다. 기존의 간략한 문서를 베이스로 지금 돌아가는 환경을 실측해 가며 하나씩 맞춰야 했다. 문서화가 덜 된 부분까지 같이 정리하다 보니 솔직히 대공사였다. 이 대공사는 AI와 함께 진행했다. 목적을 설명하고 같이 계획을 세우고 리스크를 확인하고, 실제로 실행한 뒤 그 로그를 다시 넣어가며 진행했다. 특히 중요하게 생각한 포인트는 이게 제대로 됐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였다. 확인 방법이 없으면 다시 물었고, 콘솔에서 확인해야 하는 건 직접 보면서 맞췄다. 배운 절차는 다시 따라갈 수 있도록 문서로 남겼다.
물론 다 매끄럽게 풀린 건 아니었다. 데이터베이스를 옮기는 과정에서는 더 나은 구조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일정 안에 안전하게 바꾸기 어렵다고 판단해 그대로 남겨 둔 것도 있었다. 그렇게 두어 달을 지나고 나니 몇 달 전에는 해 본 적 없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비슷한 경험이 인프라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전에 서비스 이용약관을 손보는 법무 검토를 맡아 변호사와 직접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끝낸 적도 있었다. 이쪽은 더더욱 내 전공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영역이었고, 그 과정에서도 AI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인프라와 법무 검토. 둘은 내게서 떨어진 거리가 달랐지만, 둘 다 원래 내 영역 바깥의 일이었다. 그런데 AI와 함께라면 아예 닿을 수 없는 거리는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한편으로는 그 경험을 반대로 보게 되기도 했다. 방금 배운 일을 다시 따라갈 수 있도록 문서로 남기고 있었다. 내가 남의 영역에 이렇게 빨리 들어갈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내가 몇 년 동안 쌓은 영역에 예전보다 훨씬 빨리 들어올 수 있는 것 아닐까.
AI와 함께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반복해서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이대로 5년이 지나면 지금 내가 가진 장점이 지금만큼 큰 강점으로 남아 있을까.
당시에는 이렇게 정리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조금 불편했다. 이 경험이 나에게 창업을 하고 싶게 만든 건 아니다. 창업은 원래 하고 싶었다. 바뀐 건 미뤄 둘 이유였다.
지금 돌아보면, 몇 년을 더 일하며 쌓게 될 경험이 당연히 지금의 강점을 더 크게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직접 경험한 변화의 속도는 그 전제를 꽤 크게 흔들었다. 반대로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영역이 넓어졌다는 건, 직접 무언가를 시작했을 때 혼자서 갈 수 있는 거리도 예전보다 더 길어졌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언젠가 할 생각이었던 일을 굳이 몇 년 뒤까지 미뤄야 할 이유는 예전만큼 크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언젠가'는 2026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