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적이지만 일본에 대해 말할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일본인, 어머니는 한국인이다. 나는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라 대학까지 마쳤다. 일본어를 전혀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어릴 때 구몬 일본어를 했고, 고등학교 제2외국어 시험에서는 1등급도 받았다. 그래도 자유롭게 대화할 수준은 아니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나 자신을 돌아봤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아버지가 일본인이고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 말고 내가 일본에 대해 내 경험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구나. 누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다만 이미 가지고 있는 배경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조금 아깝다고 느꼈다. 그래서 일본에서 직접 살아보기로 했다. 처음 떠올린 방법은 대학원 진학이었다.
문제는 대학원에 붙은 뒤 일본으로 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직 어디에 진학할지도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일본으로 건너갔다. 대학이 많으니 선택지도 많겠지 싶어 도쿄를 골랐다. 친가 쪽 친척이 있는 곳도 아니었다.
2017년 3월, 부모님과 함께 도쿄에 도착했다. 처음 며칠 동안 집을 알아보고, 휴대전화를 개통하고, 은행 계좌를 개설했다. 당시 내 일본어만으로는 이런 일을 처리하기 어려워서 은행 창구나 부동산에서는 아버지가 나 대신 말해주기도 했다. 며칠 뒤 부모님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공항에서 부모님을 배웅하면서 일본에 왔다는 느낌보다 먼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 이제 진짜 혼자구나.
그전까지 나는 계속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그 순간 마음이 먹먹했다.
일본에서 생활하려면 생활비도 벌어야 했다. 전공은 전자전기공학이었지만, 기왕이면 소프트웨어 일을 경험해보고 싶어서 Consorte라는 회사에서 웹 엔지니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일본어로 의사소통은 됐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표현하지는 못했다. 리뷰를 받고, 질문하고, 다시 해보는 날들이었다. 어느 순간 주변에서 이제는 스펙 이야기가 통한다는 말을 들었다.
기술보다 말에서 막힐 때도 있었다. cache는 이미 알고 있는 단어였는데, 대화 중에 キャッシュ(캿슈)라는 소리로 들으면 같은 단어라는 게 바로 연결되지 않았다.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번은 길거리에서 외국인이 영어로 길을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일본어로 대답하고 있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서 일본어와 영어는 같은 묶음에 들어 있었던 것 같다.
한국어가 아닌 언어.
외국어.
몇 년이 지나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순간 일본어는 영어와 같은 '외국어' 묶음에서 빠져나와 별개의 언어가 되어 있었다.
처음 일본에 갔을 때는 입을 열자마자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질문은 조금씩 늦게 왔다. 나중에는 두세 마디쯤 대화를 나눈 뒤에야 같은 질문을 듣기도 했다. 외국인이라는 티가 없어졌다기보다, 그 티가 드러나는 시점이 조금 뒤로 밀렸다는 표현이 더 맞다.
2019년에는 대학원에 들어갔다. 연구와 이런저런 활동으로 2년을 보냈다. 졸업 후에는 Future라는 IT 컨설팅 회사에 들어갔다. 회의 내용을 정리하고, 다른 사람이 읽을 문서를 비즈니스 일본어로 써야 했다. 초안을 올리면 수정 제안과 코멘트가 우수수 달렸고, 고치면 또 달렸다.
말로 회의를 따라갈 수 있게 된 다음에도, 문서에서는 다시 초보자였다. 그리고 몇 년을 살아도 처음 듣는 일본식 외래어 앞에서는 가끔 한 박자 늦었다. 그렇게 일본에서 6년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일본에 더 남아 있어야 할 이유는 예전만큼 선명하지 않게 됐다. 반대로 한국으로 돌아갈 이유는 조금씩 많아졌다. 가족과 친구 대부분은 한국에 있었다. 특히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한국과 일본이 지도에서는 가까워도, 마음대로 오갈 수 없다면 꽤 먼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시기에 가족 일로 마음을 졸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일본 회사에서는 일해봤지만, 한국 회사에서는 아직 일해본 적이 없었다. 일본에서의 경험을 더 늘리는 것보다 한국에서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쪽이 더 궁금해졌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가끔 그리운 것들이 있다. 노천온천도 그렇고, 아무 생각 없이 오래 걷던 공원과 강변도 그렇다.
처음 일본으로 갈 때 나는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본에 대해 말할 것이 별로 없었다. 이제는 서류에 적힌 국적 말고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생겼다.
어디서 살았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말이 들리지 않았는지, 무엇이 그리운지.
요즘 가족과 일본 여행을 가면, 아버지는 일본어로 말하다가 가끔 한국어 단어를 섞는다. 그러면 내가 옆에서 일본어로 거든다.